달력

5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마츠하나 전력]
"부르지 않으려 기억하는 이름이 있다."

*사망소재有
*하나마키가 죽고 난 뒤 마츠카와의 이야기입니다.

-

 “150엔입니다.”
 바지 주머니에서 짤랑이던 동전들을 꺼내 손바닥에 펼쳐보았다. 10엔짜리 일곱 개. 쯧, 혀를 찼다. 마이 안주머니에서 거뭇한 지갑을 꺼내 천 엔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봉투에 담아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봉투가 필요하냐는 점원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고작 맥주 한 캔인데 뭐, 라고 생각했다. 거스름돈과 맥주를 받은 나는 편의점의 창가자리로 향했다. 창문에 붙어있는 바 테이블 형식의 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맥주 캔을 땄다. 경쾌한 소리가 짧게 울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맥주를 한 모금 입에 털어 넣었다. 쓴 향이 입안에 그득히 퍼졌다. 누가 술이 달면 어른이 된다고 했는가. 나이는 어느새 100세 인생의 3할을 앞두고 있는데, 어른은 대체 언제 될 생각인지. 쓴 맛에 얼굴을 찌푸리며 먹다보니 어느새 캔이 제법 가벼워졌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어 창문 밖을 보았다. 창문을 타고 빠르게 흘러내리는 빗물 탓에 시야에 필터 하나를 끼얹은 것 같은 형체로 보였지만, 띄엄띄엄 바깥 구경하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 3시에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은 썩 많지는 않았다. 정말 몇 안 되는 귀가부 고교생이 띄엄띄엄 보였고, 정장을 입고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바삐 걸어가는 회사원도 몇 있었다. 우산을 잊은 것인지 비를 피해 달려가는 사람도 한둘 보였다.
 일상이었다. 그들에게는. 평일 오후에 거리에 나오면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 그렇지만 무늬 하나 없는 까만 넥타이에 까만 정장을 입고 편의점에서 맥주를 대낮에 마시고 있는 사람은 쉽게 보긴 힘들지. 그렇겠지. 일단 나도 잘 보지 못했으니까. 점원과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편의점에서 나는 이따금씩 느껴지는 점원의 시선을 이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얕게 남아 찰랑거리는 맥주를 쓰레기통에 버리고서 편의점을 나왔다.
 우산을 펼치고 나서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하고 생각했다. 집에 쌓인 우산 중 하나를 아무렇게나 들고 나왔는데 그마저도 검정색이었다. 갈색 정도가 좋았을 텐데. 지나가던 사람이 멈칫해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길을 따라 걸었다.
 십여 분을 걷다 보니 익숙한 작은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꽃내음이 짙게 베여왔다. 주머니 두 개가 고작인 말끔한 앞치마를 입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익숙한 남자가 나를 반겼다.
 "아, 마츠카와씨. 오랜만이에요."
 작은 인사를 건넨 그는 흰 꽃다발을 내밀었다. 감사인사를 하고 꽃집을 나섰다. 쭉 흰색이었다. 조문을 가면 다른 색이 이따금씩 섞인 것을 빈번하게 볼 수 있지만 나는 계속 흰색을 고집했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그 녀석이지만. 꽃은 여러가지 색이 섞인 것도 예쁘지만 한 가지 계열로 모아둔 게 제일이라고 십수 번은 말했을 터이다. 국화만 있는 게 정석이지만 몇 년 전부터는 장미나 안개꽃 등을 넣기 시작했다. 그 녀석이라면 하나만 계속 준다고 지겨워 할 것 같아서.
 제법 걸었다. 신사 하나와 학교 두 개를 지나칠만큼. 분위기가 밝지만은 않은 공원이 눈에 띄었다. 묘원이었다. 공원에 들어선 나는 쭉 걸어가서 끝자락 즈음에 멈춰섰다. 이 녀석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두고간 꽃이 몇 다발 놓여있었다. 우리가 좋아했던, 사랑했던 소년을 청년이 되어 만나러 온. 나도 마찬가지였다. 준비해온 흰 꽃다발을 놓았다.
 "오랜만이야."
 이름 여덟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지만, 나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긴 시간동안 무뎌졌고, 추억들을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이 감정이 그 이름을 꺼내면 북받쳐 올라올 것 같았기에.
 하나마키 타카히로, 나는 네 이름을 부르지 않으려 기억한 지 7년이 되는 날을 맞이했다.
Posted by WinterA
|
 [보쿠아카] 생일
*12월 5일 아카아시 케이지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

넓지 않은 방 안에 카랑하게 울려퍼지는 알람시계에 아카아시 케이지는 얼굴을 한껏 구기며 눈을 떴다. 창문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만 보면 여느 봄날의 하루 같았다. 아카아시는 선반으로 더듬더듬 손을 뻗어 그칠 생각을 않는 알람시계를 껐다. 아카아시는 약속이 없는 오늘 알람을 맞춰둔 것은 분명히 계획해둔 것이 있었을 텐데, 라며 기억을 짚었다.
 그때 문득 뇌리를 스쳐간 것이 하나 있었다. 대청소. 겨울 외투를 꺼내고 얇은 옷들을 넣는 일은 지금 하기에는 확실히 늦었다. 11월 중순에서 하순이 보통. 아카아시는 날씨가 갑자기 따뜻해질 수도 있다며 스스로를 타협하고서 청소를 미뤄두었다. 전날 저녁에 갑자기 오기가 돌아 청소를 해야겠다며 옷장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돌연 귀찮아져서 오늘로 미룬 것.
 아카아시는 오늘이 아니면 새해가 올 때까지 청소를 못할 듯 싶어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흐릿한 시야에 한 번 더 선반을 더듬어 안경을 찾아썼다. 제법 길어진 앞머리를 왜 집에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는 미용실 핀으로 고정시켰다. 아카아시는 창고에 박혀있던 옷 바구니와 버릴 옷을 담기 위한 비닐봉지까지 꺼내들었다.
 학생들이 학교로 등교를 할 시간 즈음부터 시작된 청소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겨우 마무리 되었다. 버릴 옷이 어째서인지 쓰레기 봉투에 한가득 담겨 있는 것을 보고 아카아시는 수거함에 버리고 와야겠다며 슬리퍼를 신고 집을 나섰다. 평일 한낮의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사람이 없었다. 아카아시는 편의점에서 대충 도시락을 사왔다.
 집에 도착해서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전원 코드를 꼽으려고 할 때였다. 잠잠하던 아카아시의 휴대폰이 진동 소리를 내며 울렸다. 아카아시는 코드를 꼽다 말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본가에서 온 전화였다. 아카아시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제 어머니였다. 12월 5일. 아카아시의 생일날에 매번 이쯤에 전화가 온다. 아카아시는 무언가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어머니의 말에 괜찮다며 주말에 내려가겠다고 답했다. 짧은 전화 통화가 끝나고 아카아시는 도시락을 먹을 기분이 도저히 나지를 않아 전자레인지 안에 그대로 두고 방으로 돌아왔다. 잠이라도 청하는 게 낫겠다 싶어 아카아시는 눈을 감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아카아시의 생일에는 항상 부원들과 함께 보냈다. 졸업한 뒤에도 이년 정도까지는 대부분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 뒤로는 취업을 한 사람과 대학에 다니는 사람이 나뉘고 각자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어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작년의 생일에는 아카아시가 본가에 내려가서 모이지 못한다는 말을 먼저 부원들에게 전했다. 만나지 못했으니 메일로 생일카드를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올해 생일에는 아카아시가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조금씩 달라져가는 모습에 이질감이 들었던 것일 수도 있다. 차라리 혼자 보내기를 택한 아카아시는 생일인 것을 잊으려 했다. 그런 와중에 집에서 전화가 온 것이었다.
 아카아시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캄캄해진 뒤였다. 아카아시는 시계를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부재중 전화가 13통이 와있었다. 아카아시는 당황하며 발신자를 확인했다. '보쿠토 선배'. 보쿠토였다. 아카아시는 급하게 보쿠토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무슨 일이세요?"
 "무슨 일이긴! 지금 집이야?"
 "네, 그런데요."
 "다행이다. 나 지금 아카아시 집 앞!"
 집 앞이라는 보쿠토의 말에 아카아시는 놀라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제 눈앞에는 선물과 케이크를 들고 있는 보쿠토가 있었다.
 "생일 축하해!"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말에 오늘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Posted by WinterA
|

[보쿠아카 전력] 눈 내리는 계절

"계절"

*평범하게 연애하는 보쿠아카

-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여름이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알록달록한 단풍은 바닥에 즐비했다.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지고 눈이 내리는 계절이 찾아왔다.

다녀오겠습니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운동화를 고쳐 신고 집을 나섰다. 겨울 코트를 입었음에도 아카아시는 손을 주머니에 꼭 넣고 학교가 있는 쪽으로 걸었다. 주말 아침의 학교로 가는 길은 정말이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아카아시는 그대로 학교로 쭉 가지 않고 골목길로 길을 샜다. 그렇게 십여 분을 걷다가 익숙한 사람의 형체를 보고 멈춰 섰다. 그는 아카아시를 발견한 것인지 고개를 돌려 활짝 웃으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 케이지!”

보쿠토 코타로. 아카아시의 학교 선배였고, 이제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아카아시는 입에 미소를 머금고 보쿠토에게 다가갔다. 어른의 세계가 조금 묻어난, 그럼에도 고등학교의 모습이 겹쳐져 보이는. 그런 보쿠토였다.

부엉이처럼 쭈뼛쭈뼛 항상 세우는 것을 고수했던 머리스타일은 이제 이마를 완전히 덮는 평범한 머리칼이 되어 있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머리를 내리고 왔을 때 당혹스러운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의 벽이 생긴, 제가 알던 보쿠토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겠지.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고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어떤 모습이 되던 여전히 좋아했다. 그럼에도 성년과 미성년의 벽은 존재하지 않을 리 만무했고, 아카아시는 꾸준히 그것을 의식했다. 부수고 싶어도 부술 수 없는, 그런 벽을 아카아시는 끔찍이도 싫어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부 활동은 고작 이년 만에 끝이 났고, 보쿠토는 학교를 졸업했다. 원할 때 만날 수 있으니 눈물이 날만큼 슬프지는 않았지만, 보쿠토의 빈자리가 아카아시에게는 누군가 구멍을 뚫어놓고 간 것처럼 컸다. 그것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고, 보쿠토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시기에는 조심스러웠다.

그런 나날들도 지나가고 이제 하나의 계절만 지나가면 아카아시가 졸업을 하는 계절이 온다. 보쿠토가 제게 보여주던 졸업장을 이제 자신이 받을 날이 오게 된다. 아카아시는 드디어 벽을 부술 수 있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자신과 보쿠토에게 고교 생활의 전부였던 배구부가 이제는 정말 추억 속으로 가라앉게 되는 것이다. 아카아시는 그 건에 대해 내심 속으로 신경 쓰고 있었고, 보쿠토 역시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보쿠토가 졸업을 하고 성년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변한 것은 생각보다 많았다. 아카아시가 이따금씩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고, 보쿠토는 그것을 잘 받아주었다. 조금씩 변화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적응하며 그것조차 좋아하고자 노력하고 있기에 보쿠토와 아카아시는 여전히 봄의 나라에 살고 있다.

어디 갈래?”

오랜만이니까, 선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요.”

으음... ... 일단 뭐 먹으면서 생각하자.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

보쿠토 다운 대답이었다. 아카아시는 웃으며 그러자고 했다. 둘은 자주 가던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보쿠토는 카페라떼에 휘핑크림을 추가했고, 아카아시는 시럽을 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서로 커피를 마시는 취향은 정말 달라서 커피만큼은 함께 하지 못하겠다는 말도 나올 정도였다. 보쿠토가 먼저 아카아시의 짐을 들고 창가자리에 앉았고, 아카아시는 커피를 받아 보쿠토의 맞은편에 앉았다. 보쿠토는 달달한 라떼에 빠져 생각이라고는 하지 않고 있는 듯 보였다. 보다못한 아카아시가 입을 열었다.

갈 곳, 정해야죠.”

보쿠토는 그제서야 자신들이 카페에 온 이유를 기억한 듯 했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눈치를 보며 머리를 굴렸다. 잔이 반 즈음 비었을 무렵 보쿠토가 생각난 듯 눈을 반짝였다.

가고 싶은 곳 생겼어!”

, . 어딘데요?”

그건 비밀. 일단 가자.”

“ ”

아카아시는 무어라 잔소리할 틈도 없이 어서 커피를 마시라는 재촉을 받았다. 커피를 다 마시자마자 보쿠토의 손에 이끌려 카페를 나온 아카아시는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다시피 따라갔다. 보쿠토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평범한 중심가 부근이었다. 무슨 특별히 기발한 것이라도 생각났나 싶었지만 별 거 없었다. 평소와 비슷한 데이트 코스였다.

이제 두 개 남았어!”

해가 뉘엿뉘엿 질 준비를 시작할 때 보쿠토는 이제 두 개가 남았다며 아카아시를 데리고 갔다. 첫 번째는 배를 채우는 것이었다. 배고플 때가 되긴 됐지, 하며 아카아시는 수긍했다.

이제 남은 하나는 대체 뭔가요.”

배를 든든하게 채운 아카아시가 보쿠토에게 물었다. 보쿠토는 씩 웃으며 아카아시를 중심가 쪽으로 이끌었다. 시내의 사거리에 다다르자 아카아시의 시야에는 거대한 트리가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하늘에 반짝반짝한 미니 전구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아직 크리스마스는 아니지만, 그때는 우리 여행 가니까. 트리를 못보면 크리스마스를 보낸 것 같지가 않을 것 같아서.”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손을 맞잡고 트리를 보며 말했다. 아카아시는 멍하니 보쿠토를 응시하다가 그게 뭐냐며 이윽고 웃음을 터트렸다. 보쿠토도 따라 웃었다.

눈 내리는 계절의 아름다운 밤이었다.

Posted by Winter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