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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하나] 붉은 실
*사망소재 주의
*붉은 실은 인연인 사람과 이어준다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썼습니다.

*****

예로부터 붉은 실은 운명적인 인연과 이어준다는 전설이 있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전설을 믿는 사람도 썩 많지 않고, 소설이나 드라마 따위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 즈음 되는 인물에게 운명 따위-라든지, 네 인생은 네가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둥의 말을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운명이라고는 코빼기만큼도 믿지 않는 소년에게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다.

하나마키는 태어났을 적부터 왼쪽 소지에 붉디붉은 실이 칭칭 감겨져 있었다. 제게는 옅은 색의 붉은 실로 보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고리 모양의 흉터로 보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실의 색도 진하지 않았고,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으면 거슬리지도 않았기에 하나마키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은 짙어져갔고, 실이 향하는 방향은 일정했다. 하나마키는 따라가면 신기한 일이 생길까 싶어 실의 자국을 밟아간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마키는 붉은 실의 전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붉은 실을 따라가면 제 운명의 연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것. 하나마키는 운명론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제 인연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니, 하나마키에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나마키는 그때부터 아등바등 실을 없애려고 했다. 실을 가위로 잘라보기도 했고, 손으로 잡아당겨 보기도 했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마키는 붉은 실만 따라가지 않으면 거슬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신경을 끄고 살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전설에 나오는 운명은 그리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하나마키가 성년이 되고 난 뒤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시작은 흐릿했다. 붉은 실도 옅었듯이. 그렇게 꿈을 꾸기 시작하고 나서 보름 정도 뒤에, 아기의 울음소리와 함께 작은 아기가 꿈에 나타났다. 까만 머리칼이 듬성듬성 짧게 자라나 있었고, 울음소리는 대찼다. 평범한 애기였다. 하나마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꿈의 끝 무렵에, 하나마키는 아기의 소지에 제 것과 똑 닮은 실을 보았다. 하나마키는 그제야 이 꿈이 아직까지 손에서 떨어져나갈 생각을 않는 붉은 실과 연관된 것임을 알았다. 질긴 운명을 뒤로하고 잠을 자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던 하나마키였지만, 잠을 안 자고 버티는 건 기껏해야 삼일이었다. 체념하고 다시 잠에 든 후 일주일, 일주일동안 하나마키는 아이의 갓난아기 시절에 대한 꿈을 꾸었다. 돌잔치라든지, 처음 말을 했다든지, 처음으로 걷게 됐다든지. 그런 대부분의 아이들이 겪는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하나마키는 개꿈인가 싶었는데, 아이는 점점 성장했다. 갓난아기 시절을 다 꿈에 담자, 꿈은 하나마키에게 그 아이의 유년시절을 보여주었다. 유년시절의 꿈이 끝나자,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고를 반복했다. 하나마키는 꿈속에서 아이에 대해 사소한 것들을 알 수 있었다. 이름은 마츠카와 잇세이. 좋아하는 것은 치즈 햄버그. 생일은 3월 1일. 키는.. 성장 중. 하나마키는 시간이 갈수록 생긴 거와는 다르게 좋아하는 것이라든지, 하는 행동에 제 나이에 꼭 맞는 마츠카와를 보고 꿈을 꾸는 것을 재밌어했다.

하나마키가 꿈을 꾸게 된 지 반 년이 되자 그의 꿈속에서 마츠카와는 성년이 되었다. 성년이 된 그날부터, 하나마키의 꿈은 조금씩 흐릿해졌다. 처음과는 반대로. 하나마키는 이에 의문점을 갖고 무작정 결심을 했다. 붉은 실의 흔적을 밟아 따라 가자고. 실은 그리 친절하지는 않았다. 하나마키는 꿈의 기억에 의존하여 마츠카와를 찾아갔다. 동경에서 전철을 타고 미야기현의 센다이까지 찾아갔다. 하나마키는 전철에서 드문드문 자신이 붉은 실을 따라가야 하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에 돌아갈까, 라며 생각했지만, 그의 발길은 계속해서 붉은 실을 향하고 있었다.

낮에 출발했건만, 전철역과 마츠카와가 있는 곳이 멀었기에 붉은 노을이 질 무렵에야 꿈에서 본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츠카와의 집. 꿈속에서 지겹도록 봐온 것이다. 하나마키는 초인종을 누르려 했으나, 곧 집이 완전히 비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집주인이 잠깐 외출한 게 아닌, 텅 비어있는 주인 없는 집이라는 것을. 확실히 붉은 실은 집 앞에서 끊기지 않았다. 하나마키는 붉은 실을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쭉 걷던 하나마키는 외진 곳까지 오게 되었다.

하나마키는 처음 온 장소였지만, 무슨 용도로 쓰이는 지는 알 수 있었다. 하나마키는 왜 꿈이 점점 흐릿해졌는지 알게되었다. 하나마키는 그날 처음으로 붉은 실이 가리키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언덕 아래에 있는 꽃집으로 향했다.
나만 아는 사람이니, 거창한 것은 필요없겠지.
하얀국화 한 송이와 그 겉에는 하나마키가 꿈속에서 자주 보았던 안개꽃으로 감싸져 있는 작은 꽃다발을 하나 부탁했다.
이게 지금 뭐하는 거냐..
하나마키는 깊게 한숨을 한 번 쉬고, 다시 언덕 위로 올라갔다. 언덕을 오르자, 보이는 것은 수많은 묘와 세상과 이별을 고한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나마키는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붉은 실을 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실은 한 묘 앞에서 뚝 끊겨있었다.
마츠카와 잇세이
그리 쓰여 있었다. 꿈속에서 지독하리만큼 자주 들은 이름이었다. 하나마키는 쭈그려앉아 꽃을 올려놓고 그 이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교복 입고 안 다니면 고등학생이라 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지 않았냐, 치즈 햄버그가 그렇게 맛있냐, 처진 눈썹 처음에는 웃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매력인 것 같다, 등의. 사소한, 정말 사소한. 하나마키가 만약 마츠카와를 만난다면 묻고 싶었던 것이나, 말하고 싶었던 것을 쭉 늘어놓았다. 그렇게 제법 오랜 시간을 앉아 있던 하나마키는 무릎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일어났다. 하나마키는 마츠카와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오는 하나마키의 손가락에는, 붉은 실은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있었다. 하나마키는 20년 남짓한 시간동안 자신을 귀찮게 하였던 것이 사라져서 제법 어색해했다. 소지를 매만지며, 하나마키는 전철에 올라탔다. 하고자 했던 일을 이루고 나니 피곤함이 몰려와 하나마키는 금세 잠들었다.

하나마키의 꿈속에서는 더이상 나오지 않았던 마츠카와가 나왔다. 꿈은 그의 끝을 보여주었다. 잔인하고, 잔인했다. 여태까지 분명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하나마키는 고통에 움찔댔다. 하지만, 꿈에서 깨려고 하지는 않았다. 마츠카와라는 주인공이 나오는 책의 결말을 읽고 싶었기에.

여린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가, 이내 촉촉히 젖어왔다. 눈물이 양 뺨을 따라 내려왔다. 눈물이 났던 것은 왜일까. 단순히 죽음을 보았기 때문에, 일까. 꿈의 결말이 맺어진 것인지 하나마키의 눈물은 조금씩 멎어갔다. 아직은 흐르고 있는 눈물을 뒤로 한 채 하나마키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야기의 결말은 아무도 모른다.
Posted by Wint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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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하나] 남자와 아이 2 (完)
 
*적국 약제사 마츠카와x피란민 하나마키
*전쟁 배경
*사망소재有
 
*****
 
화는 송이 정복전쟁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근방에서 견줄 국가가 없을 정도로 영토가 넓었다. 송의 선왕에 의해 다른 중소 국가들이 송의 속국이 되면서 화와 영토의 크기가 비슷해진 것. 그럼에도 화의 영토가 조금 더 넓었다. 화는 특별히 송에게 이득을 줄 수 있을만한 경제력이라든지, 지하자원 같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송의 선왕이 화를 제 나라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쓴 이유라 하면 단연 영토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의 궁정은 영토의 중앙 즈음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넓은 영토 탓에 하나마키와 마츠카와가 향하는 국경 부근과는 제법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마츠카와는 상인의 마차를 타고 화국까지 왔기 때문에 그리 힘든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깊이 쉬지 못하고 계속 걸었던 하나마키에게는 꽤나 버거웠다. 마츠카와는 빠른 시일 안에 도착하고자 했던 예정을 취소하고 하나마키의 체력을 우선시했다. 사나흘 걷는 동안 하나마키는 정말로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전까지는 번번이 보이던 피란민 떼의 반대쪽으로 향해가고 있었던 민병대나 군인들 행렬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하루하루 흐를수록 마을에 사람들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하는 게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피란민들이 되돌아오고 있었던 것.
 
보름 정도 뒤에 마츠카와와 하나마키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빈 집이 반절이었지만, 마을은 사람의 온기가 여기저기 퍼져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는 누군가에 의해 제지당하지 않았다. 하나마키는 제법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어린아이의 표정은 쉽게 드러나는 법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광경에 놀라는 모습 뒤에는 조금의 행복이 섞여 있었다. 순수하게 전쟁이 끝났다는 그 사실에 기뻐하는 아이들은 더할 나위 없이 예쁘게 보일 터였다. 마츠카와는 그런 하나마키를 보고서 옅게 미소 지으며 귀엽다는 듯 하나마키의 머리를 마구 헤집어 놓았다. 하나마키는 머리를 양팔로 감싸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마츠카와를 올려다보았다. 마츠카와는 하나마키의 표정을 한 번 따라하고서는 낮게 소리 내어 웃으며 하나마키를 앞질러 걸어갔다. 마을 골목을 따라 걷다가 귀퉁이를 돌자 휑하지만 정돈이 잘 되어있는 집이 하나 보였다. 입구에는 색이 바래있는 나무판에 ‘하나마키 료(마이)’라 쓰여 있었다. 마츠카와가 하나마키에게 이 마을에 온 적이 있냐고 물었지만, 하나마키는 전혀 기억에 없다고 답했다. 마츠카와는 하나마키의 부모가 적당히 사둔 곳이리라 생각했다. 집안에 들어가자 둘을 반기는 것은 얕게 쌓인 먼지가 흩날리는 광경이었다. 적어도 몇 년은 사람의 발길이 끊긴 듯 보였다. 그럼에도 생활할 수 있을만한 물건이나 가구 등은 모두 준비돼 있었다. 마츠카와는 하나마키는 먼지를 보고 소매를 걷더니 청소를 시작했다. 짬짬이 쉬는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청소를 하자 해가 질 때 즈음에 집안은 깨끗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마츠카와와 하나마키는 뿌듯한 얼굴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고마워요, 처음 만났는데 이렇게 해주셔서.“ 뜬금없이 하나마키가 마츠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감사의 말을 전했다. 마츠카와는 씩 웃으면서 답했다. “아니, 뭐 괜찮아. 어차피 나도 여기 있는 동안 지낼 곳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잘 됐지. 돈도 안 쓰고." "그러면 서로 좋은 거네요!" "그런 셈이지." "그런데 아저씨는 왜 화에 왔어요?" "아, 말 안 해줬었던가? 나는 약제사야. 화에는 송에 비해 약초가 많다고 들어서 공부하려고." "약제사? 아저씨 약 만드는 사람이에요?" "응. 아직은 국가자격증을 취득 못해서 다른 약제사님 밑에서 배우는 중이지만." 약제사가 신기했던 것인지 하나마키는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서 마츠카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꼬맹아 나 완전 피곤하거든." "아니, 그치만! 저 약제사랑 얘기 처음 해본단 말이에요!" "아이고 그래그래. 궁금한 거 다 물어봐. 또 뭐가 궁금하든?" 마츠카와와 하나마키는 그렇게 바닥에 드러누워 한참을 얘기하다가 잠에 들었다.

마츠카와는 오전에 집을 나가 항상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와서 하나마키와 저녁을 먹었다. 하나마키는 금세 마을에 있는 자기 또래의 아이들과 제법 가까워졌다. 저녁을 먹을 때 마츠카와는 항상 하나마키의 하루 일과를 들어줘야 했지만, 하나마키가 행복해 보이니 괜찮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둘이 지낸 지도 한 달이 넘어갔다. 화국은 완전히 송국의 속국이 된 듯 하였지만 마츠카와와 하나마키의 마을에는 영향이 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한다면 다행이었다. 그러다가 마츠카와가 조금 먼 곳으로 갔다 오는 일이 생겼다. 이틀 집을 비워야 해서 근처 이웃에게 하나마키를 부탁했지만, 마츠카와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나마키가 괜찮다며 마츠카와가 떠나기 전까지 계속 말을 해주고 나서야 마츠카와는 떠날 수 있었다. 마츠카와는 마을에서 남쪽에 있는 산으로 갔다. 처음부터 마츠카와가 화국의 국경 근처로 온 이유가 이 산 때문이었다. 마츠카와는 서적에서만 보던 약초들을 실제로 보게 되어 제법 들떴다. 그 때문에 산에서 떠난 시간이 예정보다 조금 늦어져 발걸음을 빨리 하였다. 겨우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의 입구에 다다르자 한 아이가 마츠카와에게 뛰어왔다. 하나마키와 친해져서 하나마키를 맡긴 집의 아이였다. "아저씨, 아저씨!" "아, 꼬마야. 무슨 일이니?" "하나마키가 없어졌어요! 분명히 같이 잠들었는데.. 하나마키네 집에도 없고, 이 근처에도 없었어요." 아이는 한참을 찾았던 것인지 이마에 땀이 몽글몽글 맺혀있었다. 아이를 보기 위해 쪼그려 앉아있던 마츠카와는 하나마키가 없어졌단 소식을 듣고 벌떡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신을 벗을 틈도 없이 마츠카와는 방안으로 들어가 방을 뒤졌다. 작은 오동나무 선반 위에 하나마키가 보여줬던 목패 두 개와 편지, 그리고 낯선 자루가 놓여 있었다. 낯선 자루를 확인하러 마츠카와가 선반을 보았을 때, 분명히 하나였어야 하는 편지가 두 장이 되어 있었다. 마츠카와는 바닥에 주저앉아 편지를 확인했다. 하나마키가 처음 보여줬던 편지의 뒷장이었다. 그곳에는 하나마키가 마츠카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했던 내용들이 들어있었다. 하나마키가 병을 가지고 있었던 것, 그 병을 억제하는 약값을 아이에게 주었다는 것. 약이 없으면 아이는 위험하다는 것. 마츠카와는 손을 뻗어 자루를 집었다. 자루 안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금화가 들어있었다. 마츠카와는 하나마키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가 밖으로 나가려했다. 그런데, 편지의 끝부분에 하나마키가 쓴 듯 보이는 잉크가 다 마르지도 않은 삐뚤빼뚤한 글이 쓰여 있었다. 마츠카와는 제법 긴 글을 읽기 시작했다. 잠시 뒤, 방안은 누군가의 숨죽인 울음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다.
 
아저씨, 저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신 거 알고 있었어요. 기사단인 것도 알고 있었고요. 편지를 읽었었어요. 사실 전쟁이 끝나면 어디 마을에라도 가서 돈 먹는 데 다 쓰고 확 죽어버릴까 생각했었는데, 피란민들을 놓칠 줄은 몰랐죠. 그러다가 아저씨 만난 거예요.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별 생각 없었는데, 아저씨가 막 잘해주시니까. 저는 병에 대해 잘 몰라요. 그냥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란 것만 알고 있어요. 아저씨가 약제사라는 말 듣고 아저씨한테 약 만들어 달라고 할까 생각도 했지만 어차피 낫는 것도 아니라 포기했어요. 아저씨가 저한테 뭐 많이 해줬는데 아저씨만 귀찮아지는 일이잖아요. 저 아저씨랑 있으면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마을에서 새로운 친구도 많이 만들어서 좋았어요. 그치만 아저씨도 언젠가 송으로 돌아갈 거고, 저는 부모님도 없잖아요. 돈은 저한테 필요 없는 것 같아서, 선물이에요. 고마워서 주는 보답은 아니에요. 우리 서로 빚진 거 없다고 했잖아요? 사람 선물은 거절하는 거 아니랬어요. 그니까 받아요. 아, 아저씨 없는 동안 저 돌봐주신 아주머니 엄청 좋아요. 같이 놀아준 친구도 엄청 착해요. 그 돈으로 맛있는 거 사 주세요. 그 아주머니랑 애한테는 빚진 거니까. 아저씨가 이거 읽고 있을 때쯤에는 저 엄청 멀리 갔을 거예요. 힘들게 저 찾아다니고 그러지는 마요. 알겠죠? 아저씨 두 달 동안 엄청 고마웠어요.
Posted by Wint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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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츄/쌍흑 전력] 기억의 상실
“상실”
*다자이와 관련된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남은 츄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암흑시대의 어느 날입니다. 날조 주의.

*****

나카하라는 창문 사이로 들어온 햇빛에 눈을 찡그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한 번 깨버린 잠은 다시 올 생각을 않자, 낮게 욕을 읊조리며 아침을 맞이했다. 나카하라는 완전히 떠지지 않은 눈에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쥐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나카하라는 항상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던 일이 어떤 것인지 기억나지 않자 의문점을 가졌다.

"분명히 지금쯤 전화를 하는 새끼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한참을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자, 그는 연락처를 뒤졌다. 지극히 일적인 사람들만 있는 연락처. 포트마피아의 일원을 제외하고서 다른 이의 연락처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나카하라는 한 명 한 명을 곱씹으며 찾아보았지만, 그 누구도 제게 연락할 사람은 못되었다. 애초에 작은 의문점에 깊이 파고드는 건 나카하라의 성미에 썩 맞는 일은 아니었다. 나카하라는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대충 던져놓고 예민한 날이라고 생각하며 냉수를 들이켰다.

그날은 나카하라가 큰 임무를 끝낸 다음날이었기에 일단은 쉬는날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서 와인에 절어 있었을 터였지만, 무엇에 이끌렸는지 몸단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요코하마의 날씨는 습했다. 새벽에 내린 비로 지독하게 습했고, 동시에 제법 더웠다. 나온지 십여 분도 채 되지 않아 나카하라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나카하라는 어영부영 요코하마의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대낮이 되자 더위에 못이겨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와인렉에서 제법 비싼 와인을 꺼내들었다. 옥상으로 올라가 그늘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카하라는 아직도 가시질 않은 이질감을 떨쳐 내고자 와인을 입에 털어넣었다. 처음 먹어보는 맛에 와인을 들어 레이블을 확인했다. 자신이 산 와인이 아니었다. 분명했다. 나카하라는 또다시 이질감을 느꼈다. 그는 전화기를 집어들어 이질감의 답을 가장 잘 알만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코요 누님. 잠시 시간 되시나요..?"
"네가 내게 이 시간에 전화를 하다니, 별 일이구나. 그래, 무슨 일이니?"
"미친 생각인 거 같지만.. 저 혹시 애인 있었나요? 아니면 그 오랜 파트너라든지."
"음.. 네가 애인이 있다는 건 내게 숨겼을지는 몰라도 처음 들어보구나. 파트너는 없단다. 갑자기 이런 건 왜 궁금한 거니?"
"아, 갑자기 있어야 할 사람이 없는 느낌이 들어서요."
"요즘 피곤한가 보구나. 무리하지 마렴."

코요와 전화를 끝낸 나카하라는 역시 자신이 예민한 탓이라 생각하며 남은 와인을 들이켰다. 반 즈음 취한 채 집에 돌아온 나카하라는 장갑을 벗는 순간 자신이 예민했던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장갑을 벗고 제 시야에 들어온 왼쪽 약지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카하라는 그 상태로 바로 밖으로 뛰쳐나왔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그 사람의 이름을 알면 모든 게 기억날 듯 했던 것. 가장 가까운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1시간 정도를 찾다가 나카하라는 그제서야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이 미친 짓임을 깨달았다. 수천 권의 책들 사이에서 기억도 못하는 사람 이름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폐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아 씨. 내가 왜 이딴 걸 하고 있냐.. 속으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그는 남은 시간동안 계속해서 찾았다. 일본 학자들이 쓴 저서가 모여 있는 책꽃이에 들어가 한참을 찾다가 나카하라는 한 이름을 발견하였다. 다자이. 나카하라는 그대로 풀썩 주저 앉았다. 머리속에서 다자이란 이름이 떠나가질 않았다. 이제 성은 찾았겠다, 이름을 찾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자신의 연인이자 오랜 파트너였던 사람의 이름. 다자이 오사무를 읊조리자 나카하라의 눈앞은 흐려지기 시작했다.

"..야. ..츄야! 왜 울고 있는 겐가."

뿌연 것들이 사라지고 사람의 형체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거뭇한 코트에 한 쪽 눈을 가리고 있는 안대. 쓸데없이 잘생긴 외모. 나카하라는 오랜만인 듯한 얼굴에 나카하라는 제 눈에서 흐르는 눈물도 잊고 허탈하게 웃었다.

"아, 내가 네놈을 까먹다니. 어떻게 다자이 네놈을 잊을 수가 있지."
"츄야 자네 무슨 소리 하는 겐가? 갑자기 잠에 들고서는 한참을 깨워도 안 일어나지 않나, 갑자기 울지를 않나. 벌써 죽을 때가 된 건가?"
"닥쳐, 제발."
Posted by Wint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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