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5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마츠하나 전력]
"부르지 않으려 기억하는 이름이 있다."

*사망소재有
*하나마키가 죽고 난 뒤 마츠카와의 이야기입니다.

-

 “150엔입니다.”
 바지 주머니에서 짤랑이던 동전들을 꺼내 손바닥에 펼쳐보았다. 10엔짜리 일곱 개. 쯧, 혀를 찼다. 마이 안주머니에서 거뭇한 지갑을 꺼내 천 엔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봉투에 담아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봉투가 필요하냐는 점원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고작 맥주 한 캔인데 뭐, 라고 생각했다. 거스름돈과 맥주를 받은 나는 편의점의 창가자리로 향했다. 창문에 붙어있는 바 테이블 형식의 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맥주 캔을 땄다. 경쾌한 소리가 짧게 울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맥주를 한 모금 입에 털어 넣었다. 쓴 향이 입안에 그득히 퍼졌다. 누가 술이 달면 어른이 된다고 했는가. 나이는 어느새 100세 인생의 3할을 앞두고 있는데, 어른은 대체 언제 될 생각인지. 쓴 맛에 얼굴을 찌푸리며 먹다보니 어느새 캔이 제법 가벼워졌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어 창문 밖을 보았다. 창문을 타고 빠르게 흘러내리는 빗물 탓에 시야에 필터 하나를 끼얹은 것 같은 형체로 보였지만, 띄엄띄엄 바깥 구경하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 3시에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은 썩 많지는 않았다. 정말 몇 안 되는 귀가부 고교생이 띄엄띄엄 보였고, 정장을 입고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바삐 걸어가는 회사원도 몇 있었다. 우산을 잊은 것인지 비를 피해 달려가는 사람도 한둘 보였다.
 일상이었다. 그들에게는. 평일 오후에 거리에 나오면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 그렇지만 무늬 하나 없는 까만 넥타이에 까만 정장을 입고 편의점에서 맥주를 대낮에 마시고 있는 사람은 쉽게 보긴 힘들지. 그렇겠지. 일단 나도 잘 보지 못했으니까. 점원과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편의점에서 나는 이따금씩 느껴지는 점원의 시선을 이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얕게 남아 찰랑거리는 맥주를 쓰레기통에 버리고서 편의점을 나왔다.
 우산을 펼치고 나서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하고 생각했다. 집에 쌓인 우산 중 하나를 아무렇게나 들고 나왔는데 그마저도 검정색이었다. 갈색 정도가 좋았을 텐데. 지나가던 사람이 멈칫해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길을 따라 걸었다.
 십여 분을 걷다 보니 익숙한 작은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꽃내음이 짙게 베여왔다. 주머니 두 개가 고작인 말끔한 앞치마를 입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익숙한 남자가 나를 반겼다.
 "아, 마츠카와씨. 오랜만이에요."
 작은 인사를 건넨 그는 흰 꽃다발을 내밀었다. 감사인사를 하고 꽃집을 나섰다. 쭉 흰색이었다. 조문을 가면 다른 색이 이따금씩 섞인 것을 빈번하게 볼 수 있지만 나는 계속 흰색을 고집했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그 녀석이지만. 꽃은 여러가지 색이 섞인 것도 예쁘지만 한 가지 계열로 모아둔 게 제일이라고 십수 번은 말했을 터이다. 국화만 있는 게 정석이지만 몇 년 전부터는 장미나 안개꽃 등을 넣기 시작했다. 그 녀석이라면 하나만 계속 준다고 지겨워 할 것 같아서.
 제법 걸었다. 신사 하나와 학교 두 개를 지나칠만큼. 분위기가 밝지만은 않은 공원이 눈에 띄었다. 묘원이었다. 공원에 들어선 나는 쭉 걸어가서 끝자락 즈음에 멈춰섰다. 이 녀석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두고간 꽃이 몇 다발 놓여있었다. 우리가 좋아했던, 사랑했던 소년을 청년이 되어 만나러 온. 나도 마찬가지였다. 준비해온 흰 꽃다발을 놓았다.
 "오랜만이야."
 이름 여덟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지만, 나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긴 시간동안 무뎌졌고, 추억들을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이 감정이 그 이름을 꺼내면 북받쳐 올라올 것 같았기에.
 하나마키 타카히로, 나는 네 이름을 부르지 않으려 기억한 지 7년이 되는 날을 맞이했다.
Posted by WinterA
|
 [보쿠아카] 생일
*12월 5일 아카아시 케이지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

넓지 않은 방 안에 카랑하게 울려퍼지는 알람시계에 아카아시 케이지는 얼굴을 한껏 구기며 눈을 떴다. 창문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만 보면 여느 봄날의 하루 같았다. 아카아시는 선반으로 더듬더듬 손을 뻗어 그칠 생각을 않는 알람시계를 껐다. 아카아시는 약속이 없는 오늘 알람을 맞춰둔 것은 분명히 계획해둔 것이 있었을 텐데, 라며 기억을 짚었다.
 그때 문득 뇌리를 스쳐간 것이 하나 있었다. 대청소. 겨울 외투를 꺼내고 얇은 옷들을 넣는 일은 지금 하기에는 확실히 늦었다. 11월 중순에서 하순이 보통. 아카아시는 날씨가 갑자기 따뜻해질 수도 있다며 스스로를 타협하고서 청소를 미뤄두었다. 전날 저녁에 갑자기 오기가 돌아 청소를 해야겠다며 옷장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돌연 귀찮아져서 오늘로 미룬 것.
 아카아시는 오늘이 아니면 새해가 올 때까지 청소를 못할 듯 싶어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흐릿한 시야에 한 번 더 선반을 더듬어 안경을 찾아썼다. 제법 길어진 앞머리를 왜 집에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는 미용실 핀으로 고정시켰다. 아카아시는 창고에 박혀있던 옷 바구니와 버릴 옷을 담기 위한 비닐봉지까지 꺼내들었다.
 학생들이 학교로 등교를 할 시간 즈음부터 시작된 청소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겨우 마무리 되었다. 버릴 옷이 어째서인지 쓰레기 봉투에 한가득 담겨 있는 것을 보고 아카아시는 수거함에 버리고 와야겠다며 슬리퍼를 신고 집을 나섰다. 평일 한낮의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사람이 없었다. 아카아시는 편의점에서 대충 도시락을 사왔다.
 집에 도착해서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전원 코드를 꼽으려고 할 때였다. 잠잠하던 아카아시의 휴대폰이 진동 소리를 내며 울렸다. 아카아시는 코드를 꼽다 말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본가에서 온 전화였다. 아카아시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제 어머니였다. 12월 5일. 아카아시의 생일날에 매번 이쯤에 전화가 온다. 아카아시는 무언가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어머니의 말에 괜찮다며 주말에 내려가겠다고 답했다. 짧은 전화 통화가 끝나고 아카아시는 도시락을 먹을 기분이 도저히 나지를 않아 전자레인지 안에 그대로 두고 방으로 돌아왔다. 잠이라도 청하는 게 낫겠다 싶어 아카아시는 눈을 감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아카아시의 생일에는 항상 부원들과 함께 보냈다. 졸업한 뒤에도 이년 정도까지는 대부분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 뒤로는 취업을 한 사람과 대학에 다니는 사람이 나뉘고 각자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어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작년의 생일에는 아카아시가 본가에 내려가서 모이지 못한다는 말을 먼저 부원들에게 전했다. 만나지 못했으니 메일로 생일카드를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올해 생일에는 아카아시가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조금씩 달라져가는 모습에 이질감이 들었던 것일 수도 있다. 차라리 혼자 보내기를 택한 아카아시는 생일인 것을 잊으려 했다. 그런 와중에 집에서 전화가 온 것이었다.
 아카아시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캄캄해진 뒤였다. 아카아시는 시계를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부재중 전화가 13통이 와있었다. 아카아시는 당황하며 발신자를 확인했다. '보쿠토 선배'. 보쿠토였다. 아카아시는 급하게 보쿠토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무슨 일이세요?"
 "무슨 일이긴! 지금 집이야?"
 "네, 그런데요."
 "다행이다. 나 지금 아카아시 집 앞!"
 집 앞이라는 보쿠토의 말에 아카아시는 놀라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제 눈앞에는 선물과 케이크를 들고 있는 보쿠토가 있었다.
 "생일 축하해!"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말에 오늘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Posted by WinterA
|

[보쿠아카 전력] 눈 내리는 계절

"계절"

*평범하게 연애하는 보쿠아카

-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여름이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알록달록한 단풍은 바닥에 즐비했다.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지고 눈이 내리는 계절이 찾아왔다.

다녀오겠습니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운동화를 고쳐 신고 집을 나섰다. 겨울 코트를 입었음에도 아카아시는 손을 주머니에 꼭 넣고 학교가 있는 쪽으로 걸었다. 주말 아침의 학교로 가는 길은 정말이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아카아시는 그대로 학교로 쭉 가지 않고 골목길로 길을 샜다. 그렇게 십여 분을 걷다가 익숙한 사람의 형체를 보고 멈춰 섰다. 그는 아카아시를 발견한 것인지 고개를 돌려 활짝 웃으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 케이지!”

보쿠토 코타로. 아카아시의 학교 선배였고, 이제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아카아시는 입에 미소를 머금고 보쿠토에게 다가갔다. 어른의 세계가 조금 묻어난, 그럼에도 고등학교의 모습이 겹쳐져 보이는. 그런 보쿠토였다.

부엉이처럼 쭈뼛쭈뼛 항상 세우는 것을 고수했던 머리스타일은 이제 이마를 완전히 덮는 평범한 머리칼이 되어 있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머리를 내리고 왔을 때 당혹스러운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의 벽이 생긴, 제가 알던 보쿠토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겠지.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고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어떤 모습이 되던 여전히 좋아했다. 그럼에도 성년과 미성년의 벽은 존재하지 않을 리 만무했고, 아카아시는 꾸준히 그것을 의식했다. 부수고 싶어도 부술 수 없는, 그런 벽을 아카아시는 끔찍이도 싫어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부 활동은 고작 이년 만에 끝이 났고, 보쿠토는 학교를 졸업했다. 원할 때 만날 수 있으니 눈물이 날만큼 슬프지는 않았지만, 보쿠토의 빈자리가 아카아시에게는 누군가 구멍을 뚫어놓고 간 것처럼 컸다. 그것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고, 보쿠토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시기에는 조심스러웠다.

그런 나날들도 지나가고 이제 하나의 계절만 지나가면 아카아시가 졸업을 하는 계절이 온다. 보쿠토가 제게 보여주던 졸업장을 이제 자신이 받을 날이 오게 된다. 아카아시는 드디어 벽을 부술 수 있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자신과 보쿠토에게 고교 생활의 전부였던 배구부가 이제는 정말 추억 속으로 가라앉게 되는 것이다. 아카아시는 그 건에 대해 내심 속으로 신경 쓰고 있었고, 보쿠토 역시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보쿠토가 졸업을 하고 성년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변한 것은 생각보다 많았다. 아카아시가 이따금씩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고, 보쿠토는 그것을 잘 받아주었다. 조금씩 변화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적응하며 그것조차 좋아하고자 노력하고 있기에 보쿠토와 아카아시는 여전히 봄의 나라에 살고 있다.

어디 갈래?”

오랜만이니까, 선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요.”

으음... ... 일단 뭐 먹으면서 생각하자.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

보쿠토 다운 대답이었다. 아카아시는 웃으며 그러자고 했다. 둘은 자주 가던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보쿠토는 카페라떼에 휘핑크림을 추가했고, 아카아시는 시럽을 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서로 커피를 마시는 취향은 정말 달라서 커피만큼은 함께 하지 못하겠다는 말도 나올 정도였다. 보쿠토가 먼저 아카아시의 짐을 들고 창가자리에 앉았고, 아카아시는 커피를 받아 보쿠토의 맞은편에 앉았다. 보쿠토는 달달한 라떼에 빠져 생각이라고는 하지 않고 있는 듯 보였다. 보다못한 아카아시가 입을 열었다.

갈 곳, 정해야죠.”

보쿠토는 그제서야 자신들이 카페에 온 이유를 기억한 듯 했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눈치를 보며 머리를 굴렸다. 잔이 반 즈음 비었을 무렵 보쿠토가 생각난 듯 눈을 반짝였다.

가고 싶은 곳 생겼어!”

, . 어딘데요?”

그건 비밀. 일단 가자.”

“ ”

아카아시는 무어라 잔소리할 틈도 없이 어서 커피를 마시라는 재촉을 받았다. 커피를 다 마시자마자 보쿠토의 손에 이끌려 카페를 나온 아카아시는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다시피 따라갔다. 보쿠토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평범한 중심가 부근이었다. 무슨 특별히 기발한 것이라도 생각났나 싶었지만 별 거 없었다. 평소와 비슷한 데이트 코스였다.

이제 두 개 남았어!”

해가 뉘엿뉘엿 질 준비를 시작할 때 보쿠토는 이제 두 개가 남았다며 아카아시를 데리고 갔다. 첫 번째는 배를 채우는 것이었다. 배고플 때가 되긴 됐지, 하며 아카아시는 수긍했다.

이제 남은 하나는 대체 뭔가요.”

배를 든든하게 채운 아카아시가 보쿠토에게 물었다. 보쿠토는 씩 웃으며 아카아시를 중심가 쪽으로 이끌었다. 시내의 사거리에 다다르자 아카아시의 시야에는 거대한 트리가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하늘에 반짝반짝한 미니 전구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아직 크리스마스는 아니지만, 그때는 우리 여행 가니까. 트리를 못보면 크리스마스를 보낸 것 같지가 않을 것 같아서.”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손을 맞잡고 트리를 보며 말했다. 아카아시는 멍하니 보쿠토를 응시하다가 그게 뭐냐며 이윽고 웃음을 터트렸다. 보쿠토도 따라 웃었다.

눈 내리는 계절의 아름다운 밤이었다.

Posted by WinterA
|
[보쿠아카 전력] 사랑법
"반복"
*평범하게 연애하는 보쿠아카입니다.

-

휴대폰 화면이 저 혼자 밝아졌다, 어둠을 되찾았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키보드 타이핑을 그만두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잠금 화면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 위의 상단 바에는 메시지 알림이 떠있었다. 아카아시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조금씩 자리를 차지했다. 메시지를 보낸 주인공은 정해져 있으리라. 무얼 하고 있냐는 메시지와 보낸 의도를 알 수 없는 이모티콘이 함께 와있었다. 아카아시는 작업 중이에요, 라는 말과 함께 보쿠토 선배는요? 하고 되물었다. 아카아시가 자정까지 연락을 할 남자는 보쿠토 코타로, 이 사람뿐이었다. 난 이제 집 왔어. 오늘은 조금 늦었어. 그나저나 아직도 일 하는 중?! 채팅을 할 때 언제나 문장 하나하나 따로 보내는 보쿠토 덕에 아카아시가 잠시라도 휴대폰을 놓으면 화면이 여러 번 깜빡 거릴 때도 많았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아서요. 훈련 때문에 피곤하실 텐데, 쉬세요.
 아카아시는 휴대폰 키패드를 빠르게 치며 답장을 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보쿠토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시간이 지났을 줄도 몰랐으리라. 아카아시는 찌뿌듯한 몸에 기지개를 한 번 하고,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놓았다. 건조한 시야에 눈을 벅벅 비비다 손을 더듬어 안약을 찾고 있던 찰나에, 아카아시의 휴대폰 불빛이 꺼질 생각을 않고 계속해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다시 안경을 끼고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네. 아카아시는 갑작스레 온 전화에 바로 받아서 귀에 가져다 대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아카아시의 귀에 울려 퍼졌다.
 "아니, 그게 씻으려고 하니까 갑자기 아카아시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해버렸어!"
언제나와 같이 들떠있는 목소리에 아카아시는 낮게 웃었다. 이것저것 겹치는 탓에 보름 째 서로를 보지 못해서 그 허전함을 채우는 건 목소리뿐이었다. 보쿠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대표로서 배구를 계속 해오고 있는 배구선수이고, 아카아시는 직장을 다니다가 반 년만에 퇴사하고 웹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조금씩 인지도가 쌓이고 있는 중이다. 자주 해외로 가는 보쿠토와 마감에 항상 쫒기는 아카아시였기에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아카아시는 아직 다 못 된 작업과, 보쿠토와의 통화 화면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이윽고 아카아시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내일, 만날까요."
 "내일?"
 "네, 내일. 시간 되세요?"
 "당연히 되지, 오랜만에 보는 건데! 그치만 아카아시 시간 괜찮아?"
 "네. 모처럼이니까요."
 휴대폰 너머에서도 알 수 있는 평소보다 들뜬 보쿠토에 아카아시는 얼굴에 미소가 번져갔다. 마감은 하루 밤 새면 되니까, 라고 생각하며 아카아시는 보쿠토와의 전화를 이어나갔다. 한참동안 무얼 할 지 무얼 먹을 지에 대해 끊이지 않는 대화를 나누었건만, 그대로 될 리가 없었다. 보쿠토는 제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애정 넘치는 눈빛을 뿜어내니까 할 수밖에. 아카아시도 그걸 알고 있어 시간 역시 넉넉하게 잡아두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대지에 낙엽들이 즐비한 날이었다. 순식간에 쌀쌀해진 날씨에 아카아시는 옷장에서 긴 코트를 꺼내입었다. 약속시간보다 5분 정도 일찍 도착할 수 있도록 서둘로 집을 나섰다. 만나기로 했던 역에 도착하자 아카아시의 시야에는 저를 향해 손을 붕붕 흔들고 있는 하얀 머리의 사내만 들어와있었다. 비슷한 디자인의 긴 코트. 보쿠토는 커플룩이라며 아카아시를 만나자마자 코트에 대해 떠들어댔다. 입고 오길 잘했다며 아카아시는 속으로 생각했다. 보쿠토는 그런 아카아시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카아시의 손을 붙잡고 출발했다. 이끌려가는 아카아시의 입가에는 미소가 퍼져있었다. 언제나와 똑같은 반복되는 데이트 패턴이지만, 아카아시에게는 그것도 행복이었다. 물론 보쿠토에게도. 그것은 그들만의 사랑법이었다.
Posted by WinterA
|
[오다자 전력] 갈림길
"너의 꿈 속에 나를 가두어 버렸다."
*다자이의 꿈속에 오다와 자신의 평범했던 날들이 나오고, 다자이가 현실과 꿈의 갈림길에 선 내용입니다.

-

 어둠으로 뒤덮힌 지는 좀 되었지만, 태양이 어둠을 비집고 올라오기에는 좀 이른 시각이었다. 다자이 오사무는 잠에 빠져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잠에 빠져들지 못한다는 말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잠에 빠져들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는 말이 조금 더 맞다. 넓지 않은 방 안은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와 이불이 저들끼리 쓸리는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식은 땀을 흘리기 시작하던 다자이는 이윽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거실로 나가 냉수를 들이켰다. 물을 한잔 더 떠서 방으로 돌아온 다자이는 선반 위에 있는 약봉지를 들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수면유도제였다. 비가 온 다음날마다 퀭해져서 오는 다자이에 아츠시가 잠을 못자면 약한 수면제를 먹어보는 게 어떠냐는 말에 한 통 받아온 것. 다자이는 약봉지를 이리저리 만지다 다시 내려놓고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침대에 다시 누운 다자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자이가 잠에 들지 못하는 이유는 본인도 알고 있었다.

 꿈속의 자신이 너무나도 행복해서.

 비가 오는 날마다 다자이는 악몽이 아닌 너무나도 행복한 꿈을 꾼다. 그 꿈의 주인공은 오다 사쿠노스케와 다자이 오사무였다. 다자이의 꿈에서 오다 사쿠노스케와 본인은 행복해했다. 언제나처럼 루핀에서 만났고, 다자이는 평범하게 오다와 이야기한다. 오다의 매운 카레를 다자이는 거부하고, 그런 다자이를 오다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꿈이었다. 이게 행복한 건가, 싶을 정도로 평범한 꿈. 다자이는 그 꿈을 꾸는동안 누구보다도 행복하지만, 그 꿈에서 깨어나면 누구보다도 불행해진다.

 차라리 그가 죽었던 그 장면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네만.

 다자이는 가장 떠올리기 싫어하는 기억이 꿈에 나오기를 빌 정도로 자신이 행복한 모습을 하고 있는 꿈을 싫어한다. 이미 세상과 이별을 고한 제 친구가 자신의 꿈에서는 살아있으니까. 마치 다자이의 꿈속에 영영 갇혀있는 것처럼. 다시는 볼 수 없는, 다시는 돌아 오지 않을 행복한 장면들을 보는 것은 끔찍한 것이었다. 다자이는 비가 오는 날에는 잠에 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그 기억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문이 두 개 있는 좁은 공간에서 혼자 발버둥치다가, 어느쪽을 선택해도 끔찍한 건 매한가지였다. 오늘의 다자이는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일어났다. 조금 있으면 동이 튼다. 다자이는 행복했던 기억과 마주하는 것을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

 비오는 날 밤마다 다자이 오사무는 가시밭길뿐인 갈림길에 선다.
Posted by WinterA
|
[마츠하나 전력] 사랑에 빠질 때 그 누구도 결말을 생각하진 않는다
"사랑, 이라니. 책에서만 존쟤하는 그런 감정을 나는 비웃었다."
*하나마키 독백
*약 네임버스AU

*****

사랑, 이라니. 책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감정을 나는 비웃었다. 아마도 내 시선은 다른 이들보다 몇십도 삐뚤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되먹지 못한 인간이라 생각했으니까. 유년시절 보았던 동화에서는 항상 사랑의 결실을 이루고 막을 내린다. 영원히 행복했습니다, 따위의 말과 함께. 아마 나는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의 결말은 초라했고, 누군가는 엉엉 울기도 했다.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 오히려 한사람이 사랑하는 게 더 아름다워 보였다. 사랑은 누군가 짝사랑한 결과니까. 짝사랑을 시작한 사람이든, 그 사랑에 빠져든 사람이든 상처 입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는 마냥 행복해 보이는 사랑일지라도, 내게는 전혀 아니었다. 사랑을 갈구하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하지도 않았다. 호감이 있는 상대라면, 짝사랑에서 끝. 그게 내 방식이었다.. 라고 생각했었을 텐데.

젠장할, 왜 이렇게 잘생긴 거야.

사랑에 대한 확고한 생각이 좀먹히고 있는 기분이었다. 짝사랑은 아름답지도 않았고, 괴로웠다. 보는 사람만 아름다워 보이는 건가.

아니, 이게 사랑이긴 한 건가? 단순한 몽상가잖아.

조금 지난 일이다. 단순한 꿈이었다. 나는 그 꿈에 취했을뿐이고. 꿈에서는 한 남자가 나왔다. 그 남자는 나를 위한 사람이었다. 아니, 나였는지는 모르겠다. 그의 연인이었을 수도 있다. 그저 '내' 시점에서 진행된 연애 시뮬레이션과도 같았다. 나는 그 게임의 캐릭터에게 홀딱 반하고 만 것이었다. 꿈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감정은 남아있었다. 내가 이 남자를 좋아한다, 라는 감정.

단순한 사람이었다면 마음을 쉽게 접었을 일이었다. 하지만, 엄청나게 취향이었다. 얼굴이. 곱슬곱슬한 흑발, 쳐진 눈썹, 올라간 눈꼬리. 섹시하게 생긴 사람의 표본이었다. 지금껏 호감이 있었던 사람들과는 닮은 부분이 그다지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내가 반할 수밖에 없는 남자라고. 꿈은 드문드문 계속되었다. 새로운 꿈은 아니었고,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었다. 반복되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캐릭터에 나는 빠진 것. 꿈에서 깨면 다시 보기 위해 잠에 들었다가, 그가 나오지 않으면 짜증내는 내가 한심했다. 내가 보던 그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를 꿈꾼 지 두 달이 지나고, 나는 내 사랑의 전부를 빼앗겼다. 어째서였지. 샤워를 하고 있는데, 어깨쪽 등에 희미한 한자가 쓰여있는 걸 보았다. 뭐지, 하고 빡빡 씻었지만 지워질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한자는 진해졌다.
마츠카와 잇세이.
한자는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그 이름은 마츠카와 잇세이였다. 나는 단번에 알았다. 그 이름은 꿈속의 남자 이름이라고.

나는 책 속의 사랑을 비웃었다. 그러면서 사랑을 꿈꾸던 몽상가였다. 아마 지금 나는, 그 책의 주인공이 되어있다. 그리고 꿈 위에도 서있겠지. 사랑이 누군가가 짝사랑한 결과라면, 나는 그 결과를 보기 위해 이 남자를 사랑하려고 한다. 결말이 초라할지라도, 누군가가 엉엉 울지라도, 나는 그에게 사랑을 빼앗겼다. 이 사랑을 시작할 때 나는 결말을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이들이 그랬으니까, 그들은 행복했겠지.
Posted by WinterA
|
[마츠하나] 붉은 실
*사망소재 주의
*붉은 실은 인연인 사람과 이어준다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썼습니다.

*****

예로부터 붉은 실은 운명적인 인연과 이어준다는 전설이 있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전설을 믿는 사람도 썩 많지 않고, 소설이나 드라마 따위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 즈음 되는 인물에게 운명 따위-라든지, 네 인생은 네가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둥의 말을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운명이라고는 코빼기만큼도 믿지 않는 소년에게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다.

하나마키는 태어났을 적부터 왼쪽 소지에 붉디붉은 실이 칭칭 감겨져 있었다. 제게는 옅은 색의 붉은 실로 보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고리 모양의 흉터로 보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실의 색도 진하지 않았고,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으면 거슬리지도 않았기에 하나마키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은 짙어져갔고, 실이 향하는 방향은 일정했다. 하나마키는 따라가면 신기한 일이 생길까 싶어 실의 자국을 밟아간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마키는 붉은 실의 전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붉은 실을 따라가면 제 운명의 연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것. 하나마키는 운명론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제 인연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니, 하나마키에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나마키는 그때부터 아등바등 실을 없애려고 했다. 실을 가위로 잘라보기도 했고, 손으로 잡아당겨 보기도 했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마키는 붉은 실만 따라가지 않으면 거슬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신경을 끄고 살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전설에 나오는 운명은 그리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하나마키가 성년이 되고 난 뒤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시작은 흐릿했다. 붉은 실도 옅었듯이. 그렇게 꿈을 꾸기 시작하고 나서 보름 정도 뒤에, 아기의 울음소리와 함께 작은 아기가 꿈에 나타났다. 까만 머리칼이 듬성듬성 짧게 자라나 있었고, 울음소리는 대찼다. 평범한 애기였다. 하나마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꿈의 끝 무렵에, 하나마키는 아기의 소지에 제 것과 똑 닮은 실을 보았다. 하나마키는 그제야 이 꿈이 아직까지 손에서 떨어져나갈 생각을 않는 붉은 실과 연관된 것임을 알았다. 질긴 운명을 뒤로하고 잠을 자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던 하나마키였지만, 잠을 안 자고 버티는 건 기껏해야 삼일이었다. 체념하고 다시 잠에 든 후 일주일, 일주일동안 하나마키는 아이의 갓난아기 시절에 대한 꿈을 꾸었다. 돌잔치라든지, 처음 말을 했다든지, 처음으로 걷게 됐다든지. 그런 대부분의 아이들이 겪는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하나마키는 개꿈인가 싶었는데, 아이는 점점 성장했다. 갓난아기 시절을 다 꿈에 담자, 꿈은 하나마키에게 그 아이의 유년시절을 보여주었다. 유년시절의 꿈이 끝나자,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고를 반복했다. 하나마키는 꿈속에서 아이에 대해 사소한 것들을 알 수 있었다. 이름은 마츠카와 잇세이. 좋아하는 것은 치즈 햄버그. 생일은 3월 1일. 키는.. 성장 중. 하나마키는 시간이 갈수록 생긴 거와는 다르게 좋아하는 것이라든지, 하는 행동에 제 나이에 꼭 맞는 마츠카와를 보고 꿈을 꾸는 것을 재밌어했다.

하나마키가 꿈을 꾸게 된 지 반 년이 되자 그의 꿈속에서 마츠카와는 성년이 되었다. 성년이 된 그날부터, 하나마키의 꿈은 조금씩 흐릿해졌다. 처음과는 반대로. 하나마키는 이에 의문점을 갖고 무작정 결심을 했다. 붉은 실의 흔적을 밟아 따라 가자고. 실은 그리 친절하지는 않았다. 하나마키는 꿈의 기억에 의존하여 마츠카와를 찾아갔다. 동경에서 전철을 타고 미야기현의 센다이까지 찾아갔다. 하나마키는 전철에서 드문드문 자신이 붉은 실을 따라가야 하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에 돌아갈까, 라며 생각했지만, 그의 발길은 계속해서 붉은 실을 향하고 있었다.

낮에 출발했건만, 전철역과 마츠카와가 있는 곳이 멀었기에 붉은 노을이 질 무렵에야 꿈에서 본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츠카와의 집. 꿈속에서 지겹도록 봐온 것이다. 하나마키는 초인종을 누르려 했으나, 곧 집이 완전히 비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집주인이 잠깐 외출한 게 아닌, 텅 비어있는 주인 없는 집이라는 것을. 확실히 붉은 실은 집 앞에서 끊기지 않았다. 하나마키는 붉은 실을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쭉 걷던 하나마키는 외진 곳까지 오게 되었다.

하나마키는 처음 온 장소였지만, 무슨 용도로 쓰이는 지는 알 수 있었다. 하나마키는 왜 꿈이 점점 흐릿해졌는지 알게되었다. 하나마키는 그날 처음으로 붉은 실이 가리키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언덕 아래에 있는 꽃집으로 향했다.
나만 아는 사람이니, 거창한 것은 필요없겠지.
하얀국화 한 송이와 그 겉에는 하나마키가 꿈속에서 자주 보았던 안개꽃으로 감싸져 있는 작은 꽃다발을 하나 부탁했다.
이게 지금 뭐하는 거냐..
하나마키는 깊게 한숨을 한 번 쉬고, 다시 언덕 위로 올라갔다. 언덕을 오르자, 보이는 것은 수많은 묘와 세상과 이별을 고한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나마키는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붉은 실을 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실은 한 묘 앞에서 뚝 끊겨있었다.
마츠카와 잇세이
그리 쓰여 있었다. 꿈속에서 지독하리만큼 자주 들은 이름이었다. 하나마키는 쭈그려앉아 꽃을 올려놓고 그 이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교복 입고 안 다니면 고등학생이라 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지 않았냐, 치즈 햄버그가 그렇게 맛있냐, 처진 눈썹 처음에는 웃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매력인 것 같다, 등의. 사소한, 정말 사소한. 하나마키가 만약 마츠카와를 만난다면 묻고 싶었던 것이나, 말하고 싶었던 것을 쭉 늘어놓았다. 그렇게 제법 오랜 시간을 앉아 있던 하나마키는 무릎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일어났다. 하나마키는 마츠카와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오는 하나마키의 손가락에는, 붉은 실은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있었다. 하나마키는 20년 남짓한 시간동안 자신을 귀찮게 하였던 것이 사라져서 제법 어색해했다. 소지를 매만지며, 하나마키는 전철에 올라탔다. 하고자 했던 일을 이루고 나니 피곤함이 몰려와 하나마키는 금세 잠들었다.

하나마키의 꿈속에서는 더이상 나오지 않았던 마츠카와가 나왔다. 꿈은 그의 끝을 보여주었다. 잔인하고, 잔인했다. 여태까지 분명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하나마키는 고통에 움찔댔다. 하지만, 꿈에서 깨려고 하지는 않았다. 마츠카와라는 주인공이 나오는 책의 결말을 읽고 싶었기에.

여린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가, 이내 촉촉히 젖어왔다. 눈물이 양 뺨을 따라 내려왔다. 눈물이 났던 것은 왜일까. 단순히 죽음을 보았기 때문에, 일까. 꿈의 결말이 맺어진 것인지 하나마키의 눈물은 조금씩 멎어갔다. 아직은 흐르고 있는 눈물을 뒤로 한 채 하나마키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야기의 결말은 아무도 모른다.
Posted by WinterA
|
[마츠하나] 남자와 아이 2 (完)
 
*적국 약제사 마츠카와x피란민 하나마키
*전쟁 배경
*사망소재有
 
*****
 
화는 송이 정복전쟁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근방에서 견줄 국가가 없을 정도로 영토가 넓었다. 송의 선왕에 의해 다른 중소 국가들이 송의 속국이 되면서 화와 영토의 크기가 비슷해진 것. 그럼에도 화의 영토가 조금 더 넓었다. 화는 특별히 송에게 이득을 줄 수 있을만한 경제력이라든지, 지하자원 같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송의 선왕이 화를 제 나라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쓴 이유라 하면 단연 영토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의 궁정은 영토의 중앙 즈음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넓은 영토 탓에 하나마키와 마츠카와가 향하는 국경 부근과는 제법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마츠카와는 상인의 마차를 타고 화국까지 왔기 때문에 그리 힘든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깊이 쉬지 못하고 계속 걸었던 하나마키에게는 꽤나 버거웠다. 마츠카와는 빠른 시일 안에 도착하고자 했던 예정을 취소하고 하나마키의 체력을 우선시했다. 사나흘 걷는 동안 하나마키는 정말로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전까지는 번번이 보이던 피란민 떼의 반대쪽으로 향해가고 있었던 민병대나 군인들 행렬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하루하루 흐를수록 마을에 사람들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하는 게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피란민들이 되돌아오고 있었던 것.
 
보름 정도 뒤에 마츠카와와 하나마키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빈 집이 반절이었지만, 마을은 사람의 온기가 여기저기 퍼져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는 누군가에 의해 제지당하지 않았다. 하나마키는 제법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어린아이의 표정은 쉽게 드러나는 법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광경에 놀라는 모습 뒤에는 조금의 행복이 섞여 있었다. 순수하게 전쟁이 끝났다는 그 사실에 기뻐하는 아이들은 더할 나위 없이 예쁘게 보일 터였다. 마츠카와는 그런 하나마키를 보고서 옅게 미소 지으며 귀엽다는 듯 하나마키의 머리를 마구 헤집어 놓았다. 하나마키는 머리를 양팔로 감싸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마츠카와를 올려다보았다. 마츠카와는 하나마키의 표정을 한 번 따라하고서는 낮게 소리 내어 웃으며 하나마키를 앞질러 걸어갔다. 마을 골목을 따라 걷다가 귀퉁이를 돌자 휑하지만 정돈이 잘 되어있는 집이 하나 보였다. 입구에는 색이 바래있는 나무판에 ‘하나마키 료(마이)’라 쓰여 있었다. 마츠카와가 하나마키에게 이 마을에 온 적이 있냐고 물었지만, 하나마키는 전혀 기억에 없다고 답했다. 마츠카와는 하나마키의 부모가 적당히 사둔 곳이리라 생각했다. 집안에 들어가자 둘을 반기는 것은 얕게 쌓인 먼지가 흩날리는 광경이었다. 적어도 몇 년은 사람의 발길이 끊긴 듯 보였다. 그럼에도 생활할 수 있을만한 물건이나 가구 등은 모두 준비돼 있었다. 마츠카와는 하나마키는 먼지를 보고 소매를 걷더니 청소를 시작했다. 짬짬이 쉬는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청소를 하자 해가 질 때 즈음에 집안은 깨끗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마츠카와와 하나마키는 뿌듯한 얼굴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고마워요, 처음 만났는데 이렇게 해주셔서.“ 뜬금없이 하나마키가 마츠카와에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감사의 말을 전했다. 마츠카와는 씩 웃으면서 답했다. “아니, 뭐 괜찮아. 어차피 나도 여기 있는 동안 지낼 곳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잘 됐지. 돈도 안 쓰고." "그러면 서로 좋은 거네요!" "그런 셈이지." "그런데 아저씨는 왜 화에 왔어요?" "아, 말 안 해줬었던가? 나는 약제사야. 화에는 송에 비해 약초가 많다고 들어서 공부하려고." "약제사? 아저씨 약 만드는 사람이에요?" "응. 아직은 국가자격증을 취득 못해서 다른 약제사님 밑에서 배우는 중이지만." 약제사가 신기했던 것인지 하나마키는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서 마츠카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꼬맹아 나 완전 피곤하거든." "아니, 그치만! 저 약제사랑 얘기 처음 해본단 말이에요!" "아이고 그래그래. 궁금한 거 다 물어봐. 또 뭐가 궁금하든?" 마츠카와와 하나마키는 그렇게 바닥에 드러누워 한참을 얘기하다가 잠에 들었다.

마츠카와는 오전에 집을 나가 항상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와서 하나마키와 저녁을 먹었다. 하나마키는 금세 마을에 있는 자기 또래의 아이들과 제법 가까워졌다. 저녁을 먹을 때 마츠카와는 항상 하나마키의 하루 일과를 들어줘야 했지만, 하나마키가 행복해 보이니 괜찮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둘이 지낸 지도 한 달이 넘어갔다. 화국은 완전히 송국의 속국이 된 듯 하였지만 마츠카와와 하나마키의 마을에는 영향이 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한다면 다행이었다. 그러다가 마츠카와가 조금 먼 곳으로 갔다 오는 일이 생겼다. 이틀 집을 비워야 해서 근처 이웃에게 하나마키를 부탁했지만, 마츠카와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나마키가 괜찮다며 마츠카와가 떠나기 전까지 계속 말을 해주고 나서야 마츠카와는 떠날 수 있었다. 마츠카와는 마을에서 남쪽에 있는 산으로 갔다. 처음부터 마츠카와가 화국의 국경 근처로 온 이유가 이 산 때문이었다. 마츠카와는 서적에서만 보던 약초들을 실제로 보게 되어 제법 들떴다. 그 때문에 산에서 떠난 시간이 예정보다 조금 늦어져 발걸음을 빨리 하였다. 겨우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의 입구에 다다르자 한 아이가 마츠카와에게 뛰어왔다. 하나마키와 친해져서 하나마키를 맡긴 집의 아이였다. "아저씨, 아저씨!" "아, 꼬마야. 무슨 일이니?" "하나마키가 없어졌어요! 분명히 같이 잠들었는데.. 하나마키네 집에도 없고, 이 근처에도 없었어요." 아이는 한참을 찾았던 것인지 이마에 땀이 몽글몽글 맺혀있었다. 아이를 보기 위해 쪼그려 앉아있던 마츠카와는 하나마키가 없어졌단 소식을 듣고 벌떡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신을 벗을 틈도 없이 마츠카와는 방안으로 들어가 방을 뒤졌다. 작은 오동나무 선반 위에 하나마키가 보여줬던 목패 두 개와 편지, 그리고 낯선 자루가 놓여 있었다. 낯선 자루를 확인하러 마츠카와가 선반을 보았을 때, 분명히 하나였어야 하는 편지가 두 장이 되어 있었다. 마츠카와는 바닥에 주저앉아 편지를 확인했다. 하나마키가 처음 보여줬던 편지의 뒷장이었다. 그곳에는 하나마키가 마츠카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했던 내용들이 들어있었다. 하나마키가 병을 가지고 있었던 것, 그 병을 억제하는 약값을 아이에게 주었다는 것. 약이 없으면 아이는 위험하다는 것. 마츠카와는 손을 뻗어 자루를 집었다. 자루 안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금화가 들어있었다. 마츠카와는 하나마키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가 밖으로 나가려했다. 그런데, 편지의 끝부분에 하나마키가 쓴 듯 보이는 잉크가 다 마르지도 않은 삐뚤빼뚤한 글이 쓰여 있었다. 마츠카와는 제법 긴 글을 읽기 시작했다. 잠시 뒤, 방안은 누군가의 숨죽인 울음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다.
 
아저씨, 저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신 거 알고 있었어요. 기사단인 것도 알고 있었고요. 편지를 읽었었어요. 사실 전쟁이 끝나면 어디 마을에라도 가서 돈 먹는 데 다 쓰고 확 죽어버릴까 생각했었는데, 피란민들을 놓칠 줄은 몰랐죠. 그러다가 아저씨 만난 거예요.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별 생각 없었는데, 아저씨가 막 잘해주시니까. 저는 병에 대해 잘 몰라요. 그냥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란 것만 알고 있어요. 아저씨가 약제사라는 말 듣고 아저씨한테 약 만들어 달라고 할까 생각도 했지만 어차피 낫는 것도 아니라 포기했어요. 아저씨가 저한테 뭐 많이 해줬는데 아저씨만 귀찮아지는 일이잖아요. 저 아저씨랑 있으면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마을에서 새로운 친구도 많이 만들어서 좋았어요. 그치만 아저씨도 언젠가 송으로 돌아갈 거고, 저는 부모님도 없잖아요. 돈은 저한테 필요 없는 것 같아서, 선물이에요. 고마워서 주는 보답은 아니에요. 우리 서로 빚진 거 없다고 했잖아요? 사람 선물은 거절하는 거 아니랬어요. 그니까 받아요. 아, 아저씨 없는 동안 저 돌봐주신 아주머니 엄청 좋아요. 같이 놀아준 친구도 엄청 착해요. 그 돈으로 맛있는 거 사 주세요. 그 아주머니랑 애한테는 빚진 거니까. 아저씨가 이거 읽고 있을 때쯤에는 저 엄청 멀리 갔을 거예요. 힘들게 저 찾아다니고 그러지는 마요. 알겠죠? 아저씨 두 달 동안 엄청 고마웠어요.
Posted by WinterA
|
[다자츄/쌍흑 전력] 기억의 상실
“상실”
*다자이와 관련된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남은 츄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암흑시대의 어느 날입니다. 날조 주의.

*****

나카하라는 창문 사이로 들어온 햇빛에 눈을 찡그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한 번 깨버린 잠은 다시 올 생각을 않자, 낮게 욕을 읊조리며 아침을 맞이했다. 나카하라는 완전히 떠지지 않은 눈에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쥐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나카하라는 항상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던 일이 어떤 것인지 기억나지 않자 의문점을 가졌다.

"분명히 지금쯤 전화를 하는 새끼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한참을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자, 그는 연락처를 뒤졌다. 지극히 일적인 사람들만 있는 연락처. 포트마피아의 일원을 제외하고서 다른 이의 연락처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나카하라는 한 명 한 명을 곱씹으며 찾아보았지만, 그 누구도 제게 연락할 사람은 못되었다. 애초에 작은 의문점에 깊이 파고드는 건 나카하라의 성미에 썩 맞는 일은 아니었다. 나카하라는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대충 던져놓고 예민한 날이라고 생각하며 냉수를 들이켰다.

그날은 나카하라가 큰 임무를 끝낸 다음날이었기에 일단은 쉬는날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서 와인에 절어 있었을 터였지만, 무엇에 이끌렸는지 몸단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요코하마의 날씨는 습했다. 새벽에 내린 비로 지독하게 습했고, 동시에 제법 더웠다. 나온지 십여 분도 채 되지 않아 나카하라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나카하라는 어영부영 요코하마의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대낮이 되자 더위에 못이겨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와인렉에서 제법 비싼 와인을 꺼내들었다. 옥상으로 올라가 그늘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카하라는 아직도 가시질 않은 이질감을 떨쳐 내고자 와인을 입에 털어넣었다. 처음 먹어보는 맛에 와인을 들어 레이블을 확인했다. 자신이 산 와인이 아니었다. 분명했다. 나카하라는 또다시 이질감을 느꼈다. 그는 전화기를 집어들어 이질감의 답을 가장 잘 알만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코요 누님. 잠시 시간 되시나요..?"
"네가 내게 이 시간에 전화를 하다니, 별 일이구나. 그래, 무슨 일이니?"
"미친 생각인 거 같지만.. 저 혹시 애인 있었나요? 아니면 그 오랜 파트너라든지."
"음.. 네가 애인이 있다는 건 내게 숨겼을지는 몰라도 처음 들어보구나. 파트너는 없단다. 갑자기 이런 건 왜 궁금한 거니?"
"아, 갑자기 있어야 할 사람이 없는 느낌이 들어서요."
"요즘 피곤한가 보구나. 무리하지 마렴."

코요와 전화를 끝낸 나카하라는 역시 자신이 예민한 탓이라 생각하며 남은 와인을 들이켰다. 반 즈음 취한 채 집에 돌아온 나카하라는 장갑을 벗는 순간 자신이 예민했던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장갑을 벗고 제 시야에 들어온 왼쪽 약지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카하라는 그 상태로 바로 밖으로 뛰쳐나왔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그 사람의 이름을 알면 모든 게 기억날 듯 했던 것. 가장 가까운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1시간 정도를 찾다가 나카하라는 그제서야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이 미친 짓임을 깨달았다. 수천 권의 책들 사이에서 기억도 못하는 사람 이름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폐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아 씨. 내가 왜 이딴 걸 하고 있냐.. 속으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그는 남은 시간동안 계속해서 찾았다. 일본 학자들이 쓴 저서가 모여 있는 책꽃이에 들어가 한참을 찾다가 나카하라는 한 이름을 발견하였다. 다자이. 나카하라는 그대로 풀썩 주저 앉았다. 머리속에서 다자이란 이름이 떠나가질 않았다. 이제 성은 찾았겠다, 이름을 찾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자신의 연인이자 오랜 파트너였던 사람의 이름. 다자이 오사무를 읊조리자 나카하라의 눈앞은 흐려지기 시작했다.

"..야. ..츄야! 왜 울고 있는 겐가."

뿌연 것들이 사라지고 사람의 형체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거뭇한 코트에 한 쪽 눈을 가리고 있는 안대. 쓸데없이 잘생긴 외모. 나카하라는 오랜만인 듯한 얼굴에 나카하라는 제 눈에서 흐르는 눈물도 잊고 허탈하게 웃었다.

"아, 내가 네놈을 까먹다니. 어떻게 다자이 네놈을 잊을 수가 있지."
"츄야 자네 무슨 소리 하는 겐가? 갑자기 잠에 들고서는 한참을 깨워도 안 일어나지 않나, 갑자기 울지를 않나. 벌써 죽을 때가 된 건가?"
"닥쳐, 제발."
Posted by WinterA
|
[마츠하나] 남자와 아이 1

*적국 약제사 마츠카와x피란민 하나마키
*전쟁 배경
*사망소재有

*****

한 떼거리의 피란민들이 국경 부근으로 피란을 떠나고 있었다. 누군가의 부모 뻘 되는 자들은 한 번 경험했던 일이기에 덤덤했던 것인지, 끔찍한 악몽이 다시 반복되었다는 사실에 충격 받은 것인지 체념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피란민들이 걷는 거리는 적막하기 그지없었고, 간혹 들리는 어린 아이들의 공포에 젖은 울음소리는 그 부모나 근처 사람에 의해 금세 잦아들었다. 제 가족의 손을 꼭 붙든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한 아이는 홀로 피란민들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짐처럼 보이는 물건은 있지도 않았고, 한 손에는 소중한 물건인 냥 꼭 쥐어진 목패 두 개만이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빵 한 조각만이 들려있었다. 얇은 천으로 된 망토의 모자 사이로 삐쭉 튀어나온 분홍빛 머리는 흔히 볼 수 있는 머리색은 아니었다. 많아 봤자 10살 남짓한 나이로 보이는 그 아이에게 빠른 피란민 행렬을 따라가기란 벅찬 일이었다. 잿빛으로 얼룩진 아이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또렷한 색을 발하고 있는 녹색의 눈은 피란민들의 발끝을 향해 있었다. 놓쳐서는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 아이는 쉬지 않고 피란민 행렬을 뒤따라갔다.

-

송[松]제국과 화[花]국은 이웃한 나라였다. 송의 대륙 정벌을 위해 화를 침입하였다. 전쟁은 수년 간 이어졌으나, 송의 성급한 침입으로 인해 화를 정벌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다만, 전쟁의 장소가 되었던 화국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군사력 및 국가 재정이 크게 하락하게 된 것. 차츰 화가 국력을 다시 회복하고 있을 무렵, 송에는 선왕이 죽으면서 제 2왕자가 반란을 일으켜 제 1왕자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왕위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아버지가 다 이루지 못한 정복 활동을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표적이 된 나라는 단연 화국이었다. 전쟁이 끝난지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전쟁이 일어난 것. 화국에 승산은 없었다. 화의 남성들은 대부분 강제로 징역되었고, 여성과 노인, 어린이는 송과 떨어진 국경 부근으로 피란을 떠났다.

-

아이가 피란민 행렬은 다 피란을 떠난 것인지 아무도 없는 한 마을에 멈추어 서서 하룻밤을 묵었다. 아이는 입구 부근에서 잠을 청했는데, 눈을 뜨니 해가 중천에 있었다. 마을은 고요하고 싸늘했다. 사람을 찾기 위해 마을 곳곳을 뒤졌지만,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제 가족 챙기기 급급했던 피란민들은 혼자 잠들어 있는 아이를 챙길 여유 따위는 없었던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마을에 오뚝하게 서 있는 아이는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눈망울은 촉촉해지더니 이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엉엉 울지도 못하고, 한참 동안 아이는 숨죽여 끅끅 소리를 내며 울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아이는 이미 굳어 딱딱해진 빵을 입에 넣었다. 눈물 젖은 굳은 빵은 참 맛도 없었을 터였지만, 아이는 단숨에 다 먹어치웠다. 제법 오랜 시간 잤지만, 계속 울은 탓에 아이는 피곤함이 몰려왔다. 겨울이 아닌 것이 피란민들에게는 큰 행운이었지만, 가을은 얇은 천 하나만을 걸친 아이에게는 추울 수밖에 없었다. 추위에 떨며 아이는 잠에 들었다.

아이가 다시 눈을 뜬 것은 고소한 음식 냄새 때문이었다. 추위는 가시고, 아이의 몸에는 낯선 담요가 덮여 있었다. 아이는 담요를 들고 냄새의 출처를 따라 허름한 집 밖으로 나왔다. 아이의 눈앞에는 한 남자가 불을 피우며 음식을 하고 있었다. 시선이 느껴졌던 것인지 남자는 고개를 들어 아이를 쳐다보고서, 이내 미소 지었다.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음식 냄새에 이끌려 남자의 옆에 터벅터벅 걸어가서 앉았다.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스프를 그릇에 담아 아이에게 건네었다. 아이는 고맙다는 말할 틈도 없이 허기를 달래기 바빴다. 두어 그릇을 비운 아이는 그제야 남자에게 호기심을 가졌다. "형, 송국 사람이죠?" 아이가 처음 꺼낸 말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송의 사람인 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았다. 답은 뻔했다. 성인 남자는 전부 전쟁을 하러 갔으니 화에서 몸이 멀쩡한 성인 남자를 보는 일은 전쟁이 일어나고 한 번도 없었다고.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서 잠시 생각하는 듯 보이다가 답했다. "전쟁은 끝났어." 아이는 슬프다든지, 기쁘다든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럼, 우리 나라에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거네요. 여기는 화국 궁정에서 엄청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닌데 전쟁 소리를 듣거나 군인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응, 뭐 그렇지. 아버지가 군인이야?" "몰라요. 부모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자세히 들은 적은 없어요." 남자는 아이의 부모님이 아마 전쟁에 참여했거나, 혹은 아이를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했다. "왜 여기 혼자 있어?" "피란민 무리를 따라 왔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저만 남아있었어요. 형을 만나 다행이에요." "음.. 어디로 가는 중이었는데? 나도 어차피 화의 국경 근처 산으로 향하는 길이니까, 같이 가줄 수 있어." "그것도 모르겠어요." 아이는 남자의 물음에 모른다고 말하는 답이 반절이었다. 아이는 정말로 아는 것이 거의 없는 눈치였다. 아이와 남자는 밤새 대화를 나누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잠을 청했다.

이른 아침, 둘은 마을을 떴다. 1시간가량 걸었을 무렵, 아이는 자신의 망토 속에서 목패와 종이 하나를 꺼내 남자에게 건네었다. "제 이름은 하나마키, 하나마키 타카히로에요. 이건 부모님이 믿을 수 있는 어른에게 보여주라고 했어요." 남자는 하나마키에게서 종이와 목패를 받아 목패에 쓰인 이름을 확인했다. 하나는 '하나마키 료', 다른 하나는 '하나마키 마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하나마키 부모님의 이름이었다. 목패가 어디 것인지는 송국의 사람인 남자가 보아도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궁정에서 사용된 것. 패의 뒷부분에는 화국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일반인이 사용하기엔 제법 정교하고 화려했다. 남자는 하나마키를 한 번 빤히 바라보고서 종이를 펼쳐 보았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자신들은 궁에 소속된 기사단이라 아이와 함께 피란을 떠날 수 없다고, 지금 이 글을 누군가가 읽을 때 즈음엔 아마 전쟁이 끝나 있을 거라고. 자신들은 살아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지만, 아이에게는 자신들이 다른 곳에 있다고 전해달라고 쓰여 있었으며, 추가로 하나마키가 지낼 수 있는 마을이 나와 있었다. 하지만, 글의 내용은 중간에 끊겨 있었다. 중요하게 전하고자 하는 건 다 나와 있었지만, 남자는 어딘가 께름칙하여 하나마키에게 종이는 이게 다였냐고 물었다. "제가 받은 건 그게 다였어요." 하나마키의 말에 남자는 아마 하나마키의 부모님이 까먹었을 거라 생각하였다. 남자는 걸으면서 하나마키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하나마키가 남자를 올려다보자, 남자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마츠카와 잇세이. 누군가의 보호자가 될 정도의 나이는 아니지만, 일단은 앞으로 네 보호자네." 마츠카와는 제 이름을 밝히며, 하나마키에게 종이에 쓰인 장소로 가야한다고 말하였다. 마츠카와가 하나마키의 머리를 쓰다듬은 것은 어린 아이가 짊어져야 할 짐이 무거울 것이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츠카와와 하나마키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Posted by WinterA
|